그는 가느다란 실처럼 엉겨든 정적 위로 걸음을 내딛었다. 내가 체중을 지탱하는 이쪽 복도로 그는 몸을 기울인다. 선 위에서 스스로를 지탱할 힘만을 내게서 가져간다. 반허공은 그를 내려놓는 법이 없다. 그의 남은 오른팔은 한껏 치켜세워진 채 공룡의 등줄기를 압도하고 있었다. 겨드랑이에 듬성듬성 돋은 체모가 그의 날개를 펭귄의 깃털없는 그것으로 보이게 했다. 러닝셔츠 위로 아랫배께의 지방이 도드라져 보였다. 펭귄은 허공의 문을 두드린다. 그의 몸이 발끝에서부터 피어났다. 북극해의 습기가 그를 적셨다. 흰자위가 은빛으로 빛난다. 그는 눈을 감았다.
나의 집으로부터 계단으로 반 층을 오른 곳에 펭귄은 있었다. 알코올 기운이 훅 끼쳤다. 그의 이빨에서는 구린내가 났고, 평편한 이마는 땀으로 번지르했다. 난간과 벽 사이의 좁은 틈에 발이 끼어 있었다. 그의 구두는 좀처럼 이쪽으로 넘어오려 하지 않았다. 몇 번을 잡아당겨도 소용이 없자, 펭귄은 팔뚝을 난간 밖으로 내밀어 한 손으로 구두끈을 끌렀다. 그리고는 발목을 춤추듯 두어 번 가볍게 털었다. 구두가 삼나무에 부딪혀 쓸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가 무어라고 중얼거리며 발목을 끌어당겼다. 몸을 거두어 일어섰다. 그의 목울대는 내 머리 위의 아득한 공중에 자리해 있었다. 남자는 주름살로 가득한 눈두덩을 쓸며 침을 삼켰다. 남자는 젖어 있었고, 높았다. 그는 난간에 한쪽 팔꿈치로 의지해 있었다. 자음과 모음이 그의 입술에 짓눌려 바스라졌다. 나는 잠꼬대가 그칠 때까지 기다렸다. 이윽고 펭귄이 고개를 들었다. 등잔처럼 크고 둥근 눈이었다. 그의 손이 내 귀걸이를 만지작거렸다.
예쁘네
나 좀 도와줄래요
그는 난간 위로 올라섰다. 취한 사람치고는 날랜 몸놀림이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그의 손을 움켜쥐었다. 그는 맨발이었다. 남자의 마른 어깨 위로 달빛이 바늘처럼 돋아났다. 대여섯 걸음 걷는 동안 영원이 몇 번은 우리를 스쳐간 것 같았다.
사내는 그가 걷는 모든 바다에서 펭귄이었으리라. 나는 그가 아까 일어서며 흘린 명함에서 낯익은 카드 회사 로고를 보았다. 펭귄은 알파벳 순서로 서로 다른 혜택을 보장하는 색색의 카드더미 속에서 부패해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알과, 알을 품을 솜털과 온기와 북극해의 물기를 못 견디게 그리워했을지도 모른다. 펭귄은 웃고 있었다.
명치 근처에서 가느다란 실 같은 것이 돋아나 심장을 못 견디게 간질였다. 꼬리뼈가 저절로 오므라들 정도가 되어서야 나는 입술을 떼었다. 당신은 누구인가, 어째서 여기에 있는가, 당신은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인가. 그 많은 말들은
저기요
하는 한 마디가 오므라들기도 전에 툭, 퍽 하는 낙하음과 함께 닫혀버렸다.
나는 계단으로 내려갔다. 발자국 소리가 통로와 벽에 어지러이 찍히며 메아리를 게워냈다.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 손의 떨림이 고막을 타고 머릿속을 울렸다. 나는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엘리베이터의 계기판이 짐승의 눈동자처럼 빨갛게 일렁였다. 비틀대며 현관 계단에 발을 디뎠을 때 달은 보이지 않았다. 삼나무 가지가 아스라져 보도블록 위로 조각조각 흩어져 있었다. 남자는 검은 웅덩이 위에 있었다. 사타구니께에서 노린내와 쇠비린내가 비벼져 이쪽으로 흘러왔다. 펭귄은 지면과 충돌하자마자 해체되었다. 중력은 예리한 날로 그의 뼈와 지방을 저며냈다. 붕괴된 오른쪽 두개골에서 쏟아진 이빨들이 모래와 함게 나뒹굴었다. 현기증이 내 엉덩이를 난폭하게 눌러앉혔다. 가랑이 안쪽에서 따뜻한 물이 가득 차올랐다. 오줌은 흘러나와 김이 가시지 않은 피웅덩이에 섞여들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달콤한 어둠이었다.
